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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가르치는 어른의 수업 – EF라는 존재가 남긴 것들:<<우연은 비껴가지 않는다>>

by 큐티라라 2025. 7.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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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가르치는 어른의 수업 – EF라는 존재가 남긴 것들


 
 목  차 

 
1.말보다 깊은 존재, 나를 사유하게 만든 어른

2. 정답 없는 수업, 삶을 뒤흔드는 한 문장

3. 죽은 자의 질문, 끝나지 않는 사유

4. 진짜 어른이 남기는 것, 질문 하나의 힘

 

 

 

1. 말보다 깊은 존재, 나를 사유하게 만든 어른

 

살면서 단 한 사람, 나를 생각하게 만든 어른을 만난 적이 있는가. 말로 가르치기보다 존재로 질문을 남기고, 대답 대신 더 깊은 사유의 세계로 나를 이끌어준 누군가. 줄리언 반스의 소설 『우연은 비켜가지 않는다』에서 등장하는 엘리자베스 핀치(EF)는 바로 그런 인물이다. 닐이라는 인물이 그녀와의 수업을 통해 삶을 되짚고, 그녀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유품 속 노트를 정리하며 사유를 이어가는 장면은 한 사람의 삶이 또 다른 사람의 질문이 되는 과정을 아름답게 보여준다.

 

 

닐은 핀치를 처음 만난 순간을 이렇게 회상한다. “거위 배 속에 사료를 채워 넣듯 지식을 주입하는 수업은 하지 않을 거라는 것을, 그녀는 단 한 번의 강의로 증명해 보였다.” 그의 말처럼, 핀치의 수업은 전통적인 교실의 위계와는 전혀 달랐다. 그녀는 생각을 던지는 어른이었다. 말수를 아끼면서도 그 한마디가 뇌리에 오래 남고, 제자들을 깎아내리지 않으면서도 날카로운 사유를 끌어냈다. 닐은 그녀를 “조언하는 벼락”(p.243)이라고 표현한다. 따뜻함과 긴장감이 공존하는 수업, 그것은 단순한 정보 전달이 아니라 존재 전체를 일깨우는 경험이었다.

 

2. 정답 없는 수업, 삶을 뒤흔드는 한 문장

 

머릿속이 아니라 삶을 흔드는 수업
핀치의 가르침은 지식의 외양을 넘어서, 삶의 태도와 인식의 구조를 흔드는 일이었다. 그녀가 수업에서 남긴 말 중 하나는 오래도록 남는다.

“그녀가 우리에게 한 가지 가르쳐준 게 있다면, 역사는 길게 보아야 한다는 것.” (p.57)

이 말은 단지 과거를 시간의 흐름에 따라 분석하라는 의미가 아니다. 인간의 삶과 판단, 감정을 지금 이 순간의 반응으로 축소하지 않고, 시간의 길이를 두고 숙성시키는 사유의 윤리를 말한다. 닐은 핀치와 주기적으로 만나 점심을 먹으며 철학과 역사에 대해 토론했고, 그녀는 그 어떤 순간에도 정답을 말하지 않았다. 질문만이 남았고, 그 질문이 닐 안에서 오래 움직였다.

 

3. 죽은 자의 질문, 끝나지 않는 사유                                                                                                                                                                                                           

죽은 자가 남긴 질문, 사유는 계속된다  
그녀는 생전에 한 에세이 과제를 냈고, 닐은 끝내 그것을 제출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녀가 세상을 떠난 뒤 유언처럼 남긴 노트와 유품을 정리하면서, 닐은 그 미완의 과제를 다시 붙든다. 로마 황제 율리아누스—기독교를 버린 ‘배교자’로 낙인찍힌 인물—에 대한 에세이였다. 닐은 율리아누스의 삶과 핀치가 왜 그 인물에 끌렸는지를 동시에 탐색해 나간다. 결국 그 글은 율리아누스에 대한 글이자 핀치에 대한 것이며, 동시에 닐 자신을 반추하는 사유의 여정이 된다.

 

“역사는 무기력하게 혼수상태로 누워 우리가 크고 작은 망원경을 들이대기를 기다리는 게 아니라, 활동적이고 들끓고, 가끔 화산처럼 폭발한다.” (p.57)

 

핀치가 바라본 역사는 단순한 과거의 잔해가 아니었다. 현재와 호흡하는 살아 있는 실체였고, 지금 여기에서 우리 삶의 방향을 질문하게 만드는 장이었다. 그녀는 역사를 가르친 것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생각하는 법, 그리고 삶을 철학처럼 살아내는 법을 보여준 사람이었다.

 

삶에서 할 수 있는 일, 할 수 없는 일
닐이 핀치의 수업을 회고하며 남긴 또 다른 문장은, 그녀가 삶을 대했던 태도를 잘 보여준다.

 

“어떤 일은 우리가 어떻게 해볼 수 있고 어떤 일은 우리가 해볼 수 없다. (…) 우리가 어떻게 해볼 수 있는 일들을 하면,
그 성격상 자유롭고 방해가 없고 막힘이 없다.” (p.42)

 

삶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선택은 생각보다 단순하다. 바꿀 수 없는 것을 바꾸려 애쓸 때 우리는 고통을 겪지만, 바꿀 수 있는 것에 집중할 때 비로소 자유를 얻는다. 핀치는 이 단순한 진실을 말로 설명하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의 존재 전체로 그것을 살아냈다.

 

4. 진짜 어른이 남기는 것, 질문 하나의 힘

 

파울로 프레이리와 해방의 수업


이러한 핀치의 교육 방식은 브라질의 교육철학자 파울로 프레이리(Paulo Freire)의 ‘해방의 교육학’과 깊은 공명선을 이룬다. 프레이리는 기존 교육이 지식을 ‘은행처럼 예금’하듯 학생에게 주입한다고 비판하며, 참된 교육은 서로의 경험을 존중하는 대화와 공동탐구 속에서 이루어진다고 말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썼다.

 

“진정한 교육은 인간이 세상과 자신을 새롭게 인식하도록 돕는 것이다.”
(Education must begin with the solution of the teacher‑student contradiction,
by reconciling the poles of the contradiction so that both are simultaneously teachers and students.)

– 파울로 프레이리, 『피억압자의 교육학』(한길사, 2003), 제2장, p.72

 

 

프레이리가 강조한 “교사는 학생이기도 하고, 학생은 교사이기도 하다”는 상호주체적 교육의 원리는, 핀치가 닐과 함께했던 점심 시간의 철학적 대화 안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핀치는 지식을 ‘주는 사람’이 아니라, 함께 사유하는 사람으로 존재했고, 죽은 후에도 그 사유를 이어가게 만든 스승이었다.

 

어른의 수업은 무엇을 남겨야 하는가


닐은 결국 핀치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음을 받아들인다. 그러나 그 이해의 실패가 바로 핀치가 원했던 수업의 완성일지도 모른다. 진정한 어른은 타인을 ‘이해시키려’ 하지 않고, 오히려 존재로 질문을 남긴다. 그 질문은 다른 사람 안에서 오래 움직이고, 마침내 새로운 삶의 언어가 된다.

 

소크라테스는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안다”고 말하며, 제자들에게 지식을 주는 대신 생각할 수 있는 여지를 열어주었다. 파울로 프레이리는 지식이 아니라 해방을 강조했고, 교사와 학생 사이에 존재하는 위계를 무너뜨리는 데 집중했다. 핀치는 바로 그런 철학적 전통 속에 놓인 현대의 어른이다. 말없이, 그러나 강하게, 존재로 사유를 남기는 사람.

 

어른의 수업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정답을 가르치는 일이 아니라, 누군가의 존재가 타인의 사유를 이끌어내는 것이다. 엘리자베스 핀치는 그렇게 질문을 남겼다.

그 질문 하나가, 누군가의 삶을 다시 살아가게 만드는 것이다.

 

 

✍️ 한 문장 요약

진정한 어른의 수업은 해답을 말하기보다, 오래도록 사유하게 만드는 질문 하나를 조용히 남기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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